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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칼럼

2022년 9월 18일: 디지털 바벨론 시대에 어디에서 예배자로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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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on
댓글 0건 조회 2,890회 작성일 22-09-18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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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해한 성경 구절 중 하나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다’이다(창 6:2). 혹 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천사라고 한다. 비성경적이다. 천사는 결혼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당시의 문화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관대작을 말한다고 했으니 유력한 자들이 권 세와 정욕으로 자기 멋대로 아내를 취하였다고 말한다. 성경으로 문화를 해석하지 않고 세상 문 화로 성경을 해석하니 비성경적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실낙원하였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영적으로 죽었다. 가인은 농군으로 부르신 곳에서 예배에 실패했다. 목축업에 종사하던 아벨은 부르신 곳에서 하나님께 신 령과 진정의 예배자로 살았다. 


  예배드리지 않는 죽은 자가 신령과 진정의 산 예배자를 죽였다. 부모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 실하자 아들들의 대에 예배가 죽었다. 하나님이 예배 회복을 위하여 아벨 대신 ‘셋’을 주셨다. ‘셋’ 의 아들 ‘에노스’대에야 비로소 예배가 다시 회복되었다(창 4:26). 죽었던 예배가 살아나는데 3대 가 걸렸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셋’의 자손들, 즉 살아있는 예배자를 의미한다. ‘사람의 딸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죽이고 핍박하는 육에 속한 자들이다. 그들로 세상은 죄 악으로 충만하였다. 


  그러나 그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 ‘노아는 은혜를 입어 어디서든 부르신 곳에서 하나님과 동행 함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았다. 하나님이 홍수로 모든 피조물을 멸절시킨 후 새로운 창조를 위 한 청지기로 맡기기에 완전하였다. 노아는 새로운 피조물에 ‘위로와 쉼’이 되었다. 그는 방주 짓는 직업을 가지고 오래 살며 ‘하나님의 의’를 삶으로 설교하였다 (벧후 2:5). 목회자만 설교자가 아니 다. 성도는 부르신 곳에서 일터에서 삶으로 예수를 전하며 산다. 


  데이비드 키네만은 ‘소명적 제자도’가 이 시대에 회복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소명적 제자도’ 란 삶의 일터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라고 그는 정의하였다. PGM은 이것을 ‘Here and Now 선교’라 부른다. 


  직장과 사업장에서의 삶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정화하는 용광로다’ 아벨은 목축업 직업 의 현장에서, 노아는 배를 만드는 직업에서 조롱과 비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 


  디지털 바벨론 시대에 무자비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의 영성을 죽이는 속에서도, 아벨, 셋, 에노스처럼 우리는 예배자로 살아야 한다. 부르신 곳에서 예배자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라. 이 것이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호성기 담임목사 Rev. 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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